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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시대_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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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을 빛낸 인물-나라와 내지역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인물들의 행적을 알고 세인의 귀감이 된 그들을 본받아 포항발전에 기여합시다.
  • 충의 - 나라와 임금 그리고 백성에게 충성하고, 또한 그 뜻이 변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인물
충의
이 름 업 적
정습명 고려 의종때의 중신, 본관은 영일, 향공으로 급제, 인종때 국자사업,'기거주지제고' 등을 역임하고 최자, 김부식, 이충, 최주등과 함께 시폐십조를 상주하였다가 거부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그후 의종이 즉위하자 한림학사, 추밀원지주사가 되어 간직에 있으면서 김존중,정함 등의 간사한 무리들에게 유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는 의종에게 직언으로 보필하였으나 김존중, 정 성등의 참소로 왕명을 거역하여 스스로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고려의 충신이며 대유학자였다.
정몽주 고려말의 충신 초명은 몽란,몽룡,자는 달가 호는 포은,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영일로 정습명의 후손이며 관의 아들, 공민왕 9년(1360) 삼장시험에 연달아 장원급제 1364년 병마사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여진의 삼선,삼개를 격퇴하였고 1372년 서상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다가 다시 귀양갔다.1380년 일본사신으로 가서 해구를 금지토록 교섭하고 돌아와 1384년 두 번째 명나라에 가서 국교를 두텁게하고 돌아왔으며 1386년 또 명나라에 들어가 세공을 면제토록 청하고 돌아와 영원군에 봉해졌다.

1389년 대제학이 되어 이성계와 같이 공양왕을 세우고 좌명공신의호를 받으며, 1392년 대명률을 새로 찬정해 바쳤다. 당시 이성계의 힘이 날로 커져서 조준, 정도전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하매 그들을 제거하려다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성품이 호방하고 매서웠으며 충효로 일관했고 성리학에 매우 밝아 5부학당, 향교를 설치 유학을 진흥시켰다.

고려조의 마지막 충신이며 이 지방 오천읍이 공의 고향이다.
이귀춘 고려말 창녕에서 탄생했다.호를 옥야라 하며 본관은 창녕,벼슬은 중직대부 지현사를 지냈다.성품이 대쪽같아 청덕직절하여 한때는 창녕현 옥야에 묻혀 살다가 공양왕이 국권을 회복함에 영일 장기현감으로 왔으나 고려가 멸망하자 이태조가 벼슬을 주어도 마다하고 장기에 숨어 살면서 매일 아침 산에 올라가 고려가 망한 것을 애석해 하며 통곡했다한다. 그래서 그가 충절을 지키며 살던 장기현에는 지금도 옥야공이 산에 오르던 곳을 망령산 또는 학삼산이라 부르고 있다.
이양길 자는 의노,호는 여남, 본관은 청안으로 고려 충정왕 경인년(1350)에 급제하여 공민왕 계사년(1353)에 검교시랑 예빈사동정을 지내다가 계묘년(1363)홍건적란에 참전하여 많은 전공을 쌓아 벽상1등공신에 녹훈되어 청안군에 봉록되고 익호를 충원공이라 하였다.고려우왕 계해년에 최영의 유배가 불가하다고 직간하다가 이성계일파에게 파직당하고 낙향 은거하여 시문을 즐기다가 세상을 떠났다.
오방우 자는 동도,호는 계헌,본관은 해주로 고려예부 검교군자감 오유의 후손이다.고려 충선왕 계축년 (1313)에 태어나 충혜왕 을유년(1345)에 급제한 후 예의적랑 승공시랑전을 거쳐 공민왕조에 안찰사를 제수받았다.당시 이성계 일파들이 집권하여 많은 현량들을 축출함에 낙향하여 강원도 평해에 숨어살다가 경주 사방으로 옮겨왔다.그 후 다시 장기로 이거한 후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조선조 영조 때에 후손들이 영묘제사를 창건하고 다시 경덕제라 개칭하였다가 덕림서원을 세워 배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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