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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고대와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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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창진의 설폐(포항창 진장의 혁파와 격하된 포항창)
浦項倉鎭將의 혁파와 격하된 浦項倉

   이와 같은 포항창진의 역할이 순조롭게 지속적으로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正祖 2년(1778)6월에 「우의정이 왕에게 '포항창이 설치된지 오래되면서 別將이 각 읍의 수령들로 하여금 그 조적의 출납,이졸의 작간, 백성들의 어려움을 점검케 하는 임무를 잘 수행하지 못하는 폐단이 발생하는 데다가 포항창의 基址가 바닷가의 평평한 넓은 땅에 있어서 해마다 씻겨 나가는 데 전적으로 내 맡겨 버려두다가 반드시 수습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니, 관찰사에게 편의지책을 잘 생각하도록 영을 내려 들어보는 것이 옳다'고 여쭈니 왕이 이를 따랐다」는 기록이 그러한 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3개월이 지난 正祖 2년 9월에는 드디어 포항창의 移設問題가 거론되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첫째, 포항창은 물가에서 거의 100여步 (당시의 거리는 1理가 360步 ,1步 가 6尺) 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있어서 그 基址가 이미 씻겨 내리는 걱정이 있고  둘째, 포항창에 속한 邑의 길 里數가 고르지 못하여 왕래의 폐를 끼치고 있다는 점이다.
  반면에 흥해에 倉舍를 이건하면 本倉의 屬邑 중 가까운 흥해ㆍ청하ㆍ영일 3邑의 곡물은 종전과 같이 본창(흥해창이 됨)에서 조적하고, 장기 1읍은 조금 더 멀어졌으니까 경주 兄倉의 例에 따르든지, 아니면 따로 海倉을 설치하여 조적을 하면 실로 양쪽이 다 편안한 방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浦項倉이 수년 내에 뜨거나 무너질 염려가 없기 때문에 서둘러 변통할 일이 아니니 풍년을 기다려 移設함이 마땅하다는 주장이 있었다.(<정조실록>2년9월)
  浦項倉鎭이 1731년 설치되어 47년간 그 역할을 수행해 오던 중 일찍이 그 폐단의 문제점을 발견하여 便宜한 계책을 급하지 않게 시간을 두고 강구한 것은 타당한 조치로 보인다.
  그 결과 이설문제가 거론된지 5년이 지잔 1783년에 포항창진의 폐지가 결정되었다가 1784년3월(포항창진이 그대로 거론되고 있었음 : <정조실록> 8년 3월) 이후 7월전에 실행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포항창진은 설치된지 53년 만에 倉의 鎭將이 폐지되면서 일개 地方宮衙의 倉으로 격하되고 말았다.  즉 포항창은 이후 營門에 소속되고, 監色이 업무를 담당하여 영일지방의 조적창으로서, 濟民倉으로서 규모가 축소된 채 운영되었던 것이다.
  최근 포항창에 관계되는 중요한 文書인 '浦項倉 完義'가 발견되어 1784년 포항창진이 폐지된 사실과 포항창의 축소된 규모와 역할을 입증해 주고 있는데, 그 完義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료소장자 : 경북 영천군 고경면 삼기동, 金龍坤>

<浦項倉 完議>

  포항창의 鎭將을 혁파하고 營의 監色을 두는 것은 조적을 담당하는 신하를 피로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오로지 포항 백성들을 어렵게 만드는 정책이라 하겠다.  그것을 시행하는 조례는 이에 監營의 節目에 등재되어 있으므로 지금에 와서 다시 논할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한다면 포항창은 이미 營門에 속해 있으므로 金海의 蒜倉과 漆谷의 南倉과 조금도 다를 바 없으므로 그 임무를 담당하려는 자 부임하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지난 가을에 포항 백성들은 포항창이 영문 소속으로 바뀌게 되자 여기 陳情書를 보내왔으며 포항창에 보관하고 있는 環穀 1천 4백여석을 다른 곳으로 옮기려 하니 감색으로서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보내고 난 뒤 청소 및 뒷처리의 오가는 수고비는 무엇으로 변상을 받아야 할지 이것은 참으로 病주고 藥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포항 백성들 가운데 지각이 있는 사람은 서로 창고가 비는 것을 걱정하고 있다.  환곡이 減數되는 것이 일거리가 줄어 이익은 이익이나 監色은 곧 포창의 책임자이므로 차마 넘보기만 하고 살기 어려운 백성들을 구호하지 못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이에 여러 사람과 의논해서 漁稅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항목의 雜稅는 백성들과 半分하기로 하고 그 나머지는 절목을 하나로 만들어 물에 잠긴 것은 厚秋와 같이 하고 다른 곡물은 단일화 하여 해마다 實數가 있는대로 하고 조적에 힘을 기울여 대여하는 조항은 영문에서 작성한 절에 의하여 실제로 적합하고 편리하도록 한다.  이에 감색과 포항백성 모두가 수의하여 오래도록 文書로 남기기 위해 完議를 작성한다.  지난해 일하던 사람들 浦倉의 일꾼으로 삼아 서로 믿고 일하고자 하니 오래도록 변치 말지어다.

1784년 7월  일


          執網 :  秋     某   (手決로 나타냈음 : 필자 註)
                    鄭     某
          廳任 : 李     某
                    李     某
          監官 : 李     某(원문생략)

  당시의 포항청의 鎭將(別將)이 혁파되는 시기에 三政의 전반문제와 관련하여 환곡제를 釐正하는 문제가 심각하고도 광범하게 논의 되었다.  그리하여 환곡제의 변통방안에는 두 가지가 제시되었다.  하나는 환곡제를 혁파하여 平적制 즉 常平倉제도로 개편하되 環耗收入에 대한 給代방안으로서는 口錢이나 戶布 등 별도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환곡제를 혁파하여 社倉制로 개편 운영하되 급대방안으로서는 政府에서 출자하여 衙屯ㆍ營屯을 설치함으로써 그 稅收로써 環耗收入을 대신하자는 것이었다.  어느 경우나 환곡에 있어서의 救恤ㆍ賑貸기능과 營利ㆍ 賦稅 기능을 분리하여 전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이를 존속시키되, 후자는 이를 변혁하여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이었다.  이 두 방안 중 진대기능이 더욱 분명한 社會制가 부목을 받아 正祖연간에 여러 차례 제시되었다.  이러한 사창 제도도 宮(史)이 관장했던 운영권을 鄕君子에게 넘겨 줌으로써 宮倉보다 심한 폐단을 일으키게 되자 그 시행의 중지를 보고 말았다.
  이러한 社倉제도는 大院君 집권하에서 정부 재정을 늘리기 위해 환곡량을 복구하는 대신 새로 증가시킨 量을 사창제로 운영하도록 개혁함으로써 부활되었다.
  그러한 과정하에서의 迎日縣을 보면 1832년 경에는 邑倉과 포항창이, 1871경에는 邑倉ㆍ浦倉ㆍ社倉이 함께 운영되고 있었다.  흥해군에서 浦倉이라고 표기한 것은 浦項倉을 말하고 있다.
  (浦倉則南二十里迎日界浦項)
  당시의 浦項倉ㆍ浦項濟民倉ㆍ浦倉으로 불린 포항창이 취급한 양곡은 다음과 같다.
                                                       <迎日縣>
  浦項倉(1832) : 米 9斗 9升 5合 1勺, 漕稅米 600石 13斗 7升 7合 1勺 , 新貯租 3석 11두 7승 7작, 民倉米 364석 2두 5승 5합 6작, 太 306석 12두 4승 1합 8작, 租 4,811석 11두 2승 7합 6작, 元漕稅米 149석 1두 2승 8합 1작
  浦項濟民倉(1871 ) : 米 1,900석 5두 2승 8합 8작, 太 63석 13두 9합 9작, 租 334석 14두 5승 8합 2작, 皮牟 734석 12두 6승 2합 3작

<興海郡>
 浦倉(1832) : 米 2,609석 12두 2승 6합 5작, 太 73석 8두 7승 1합 7작,  租 4,654석 4두 2승 6합 4작
  浦倉(1871) : 米 36석 11두 8승 7합 4작, 太 196석 11두 1승 8합 1작,  租 144석 1두 1승 8합 3작

  위의 자료로 보아 비록 포항창이 鎭將의 철폐로 옛날의 컸던 규모와 역할은 할 수 없었으나 19세기 말엽 國令 에 의해 폐지될 때까지 인근 지역의 많은 양곡을 취급한 동해안 대표적인 倉으로서 그 면모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의 고찰에서 ① 通洋浦지역이 고려 때에는 迎日縣에 속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興海郡에 속하게 되고 浦項里는 兩朝에 걸쳐 迎日縣에 속했던 것으로 보아 浦項의 발전계기는 迎日縣을 모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② 포항발전의 초기 두 단계는 2元的인 地理的위치와 역할의 특수성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된다.  나아가서 포항창설치의 중요한 의미로서 첫째, '浦項'이라는 향호를 현존하는 기록으로는 처음 사용하였다는 점과 둘째, 오늘날 浦項市의 성장발전의 발판이 되었다는 점을 추출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같은 포항창이 설치된 곳이 과연 어디냐 하는 문제가 남게 된다.  이 문제의 해결은 浦項歷史 서술의 중요한 대목의 하나가 되기에 충분하다.
  현재로서 확실한 위치를 고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우선 포항창이 설치될 수 있었던 倉址의 여건을 제시한 후에 다음으로 그 여건에 합당하는 지역을 추정하면 어느 정도 문제접근이 가능 하리라 믿는다.
  창터의 여건은 첫째, 水害나 산사태 등 災害를 당하지 않는 지대가 높은 평평한 지역이어야 하며 둘째, 강이나 바닷가에서 곡물을 운반해서 저장하는 데 편리할 만큼 적당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지역이어야 하며 셋째, 倉名이 포항창으로 명명된 것으로 보아 영일현 북면지역의 포항리 내의 지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포항창은 위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지역에 세워진 것이다.  여기에 결정적인 자료로 등장하는 것이 포항창의 移設問題를 거론할 때 제시된 「포항창은 물가에서 거의 100여보(약180m : 필자 )의 거리에 있다」(<정조실록>2년 9월)는 것이다.  자연히 이러한 여건을 충족시키는 후보지는 兄山江의 北河口가 되는 浦項江(七星江)의 서쪽과 북쪽의 유역 즉 오늘날의 大興ㆍ新興ㆍ德山洞 등의 일부 지역으로 국한된다.  이 문제에서 자칫 간과하기 쉬운 중요한 것이 兄山江 북하구의 堤防축조공사인 것이다.  제방공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포항창 시절의 浦項江 쪽은 현재보다 더 넓었던 관계로 그 연안은 현재보다 內陸쪽으로 더 들어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상의 고찰로 浦項倉址는 오늘날의 迎日郡 本 지역이라고 추정한다.  이 곳이 바닷가에서 100여 步가 되는 자리이며, 지대가 높은 터이기 때문이며, 이에 덧붙여 예로부터 官廳은 유서 깊은 땅에 세워졌다는 사실이 뒷받침해 주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大興洞ㆍ南 洞ㆍ上元洞ㆍ中央洞ㆍ德山洞ㆍ新興洞 등은 포항창의 인근 지역으로 이 고장 발전의 새로운 名所로 浦項史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지역은 포항창의 국가적인 차원의 막중한 역할을 수행 또는 보조하는 곳으로서 당시 南業발달에 따른 扶助ㆍ浦項ㆍ余川ㆍ場市를 비롯한 인근 장시의 활발한 南行爲와 함께 어울려 포항 성장의 두번째 단계를 열어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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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 : 자치행정국 > 문화예술과 주무관 윤현정 (☎ 054-270-2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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