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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고대와 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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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장의 장시형성과 상업발전(부조장)
扶助場

 포항장과 여천장 발달의 배경은 扶助場(아랫부조장을 말함)의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쳐 부조시장으로 하여금 전국 적인 명성을 얻게 한 것으로 본다.  扶助場은 浦項場과 余川場이 小浦口의 場市인데 비해 大浦口의 地形을 바탕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상거래를 한 점이 특성으로 나타난다.  부조시장은 兄山江의 水路 또는 인근 육로를 통해 慶北의 내륙 지방이 안동, 대구, 상주, 영천, 경지 등지의 농산물과 浦項을 위시한 동해안의 해산물을 교역하는 큰 場市로 성장하였다.
나아가 浦項倉鎭이 1731년에 迎日縣 北面 浦項里에 설치되면서부터 이 지역은 전국적인 관심지역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고, 그 당시가 때마침 상업활동이 양성적으로 활발히 전개되기 시작한 시기였기 때문에, 곧 國家 公務 이외에도 남쪽과 북쪽지방의 농산물과 수산물 및 소금을 집산하는 중계, 중개지로서의 역할을 하는 巨市가 된 것이다.

전라도 방면의 토산물인 양곡과 北關의 토산물인 명태가 북어 등의 해산물을 각각 수요하는 함경도나 전라도에 직접 수송거래 한다는 것은 당시의 선박 수준이나 商去來의 이치로 보아서 무모하고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직접 수송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필수적인 향해용품의 공급과 안전운항을 위해 寄着地로서의 浦項을 경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大浦口인 浦項 은 전라도의 양곡 함경도의 해산물을 비롯한 江原道의 토산물 등이 집산되는 상거래의 중요한 요지가 된 것이다.
이같은 역할을 浦項場이나 余川場도 수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대체로 扶助場이 주도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웃부조에는 江東面 名里소속의 兄山倉을 설치하여 現物을 징수보관함으로써 부조시장의 農ㆍ海産物 거래 촉진에 일익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古老들의 傳하는 말에 의하면 당시 乾魚物과 糧穀 등을 매매 교역하기 위해 운집한 함경도, 전라도, 강원도 방면의 商船들이 兄山浦口의 左右兩岩에 停船한 광경은 일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교통수단은 陸地 에는 馬匹 바다에서는 帆船(돛단배)이었는데, 內陸方面의 상인들이 扶助市場에서 상품을 구입하여 荷物을 조롱말에 싣고 말한 필에 한 사람의 馬夫가 따라 수십필 때로는 백 여필씩 일열종대로 행진하는 商隊의 行列 역시 장관이었다고 한다.
과연 동해안의 元山, 남해안 馬山, 서해안의 江景시장에 필적할 만한 扶助시장의 융성한 형세를 접하는 느낌이다.  이러한 융성한 부조시장의 형세는 최근에 알려진 귀중한 金石文에 의해서도 그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兄山 건너편 弟山에서 발견된 보존상태가 양호한 碑石은 1864년 당시의 扶助市場 관계의 有司와 都監을 비롯하여 8개의 任房(길드조직과 유사)에서 左商隊의 都接長인 金以亨의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었다.  즉「左商隊都接長金公以亨有功碑」였다.  左商隊는 左團이라고 하는 褓商을 말한다.  1883년 惠商工局(軍國衙門의 관할)을 설치하여 전국적 조직의 보부청 (1866년 설치)를 통합한 후 1885년 商理局으로 개칭하면서 左ㆍ右團 이라 했다가 1899년(광무3) 이를 商務社에 이속시켜 左社와 右社로 개칭하였다.  따라서 金以亨은 부상의 여러 接長의 대표자인 것이다.  이러한 길드 조직과 규모가 扶祖市場에 관계한 사실로 미루어서 당시 부조시장의 융성을 짐잠케 해 주고 있다.

이 같은 부조시장이 일시 폐지되는 수난을 당하여 이 고장의 상업활동이 -일시 주춤한 적이 있었다.  그 일은 1871년 봄 迎日縣 治所를 生旨洞에서 大岑洞으로 옮긴 후 扶助場을 폐지하고 그 대신 浦市場(鋪市場을 말함) 新邑 南門밖에 옮겨 설치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때 生旨場(3.8일)역 폐지되고 大岑場(3.8일)이 신설되었다.  鋪市場을 浦市場으로 표시한 것은 종전 부조시장이 坐賈의 시설을 갖춘데 비해 새로 설치한 대잠의 場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자연히 부조시장의 이전의 융성은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새로 설치된 浦市場마저 제 구실을 하지 못하여 이 고장의 상업활동은 위축되기 시작하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前近代的인 官僚體制의 악습이 남아 있어서 朝廷이나  地方官衙의 令은 하나의 법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폐시 후 상인들의 고층은 당분간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扶助市場이 폐쇄 된 후로는 반면에 浦口라는 같은 성격을 지닌 浦項場이 더욱 번창했을 것으로 본다.

현재 옛 扶助市場터였던 中明1洞 兄山江岸의 도로 옆에 1m 남짓한 높이의 두 碑가 서있다.  하나는 '縣監趙公東勳復市善政碑'이고 또 하나는 '縣監南公順元善政碑'이다.  이 두 碑 역시 앞의 碑와 함께 扶助市場의 성쇠를 일러주는 귀중한 金石文 유물이 아닐 수 없다.
동네 어구에서 서쪽 강변을 바라보며, 그 옛날의 화려했던 시절을 회상하며 외로이 서있는 한 쌍의 비석이 남은 세월동안 그 자취를 지키며 변해가는 歷史의 흐름을 지켜보고자 하는 백발의 老夫婦를 연상케 하였다.
전자의 碑는 1878년(고종15) 2월에 迎日현감 趙東勳이 부조시장을 復市한데 대한 善政을 기리기 위해 洞代表, 孫鍾佑, 金胃甲, 金度曄이 세운 것이며, 후자는 1887년(고종 24년)9월에 현감 南順元의 善政을 기리기 위해 行商接長 文桂氷, 場監 馬成得, 負商接長 具鶴祚가 세운 것이다.

위의 세 碑 이외에 또 한 쌍의 碑가 있어 당시 부조시장의 형세를 말해주고 있다.  그동안 위의 세 碑처럼 너무 방치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의 내용과 그 뜻하는 바가 소개된 일이 없어 일개의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서 있는 둘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碑들은 우리 고장의 역사를 생생히 증언해 주는 귀중한 문화재로서 그 보호와 관리가 시급히 요청되는 것이다.
두 碑는 양학동에서 孝子洞으로 가는 구道路 우편 공터에서 찾는 이 없이 나란히 서 있는데 碑 자체가 크게 훼손되고 마모되어 있다.  北편의 작은 碑는 '縣監元公禹常淸德善政碑'로서 1871년 7월에 東海頭民 李華植, 金成得, 林應浩가 縣監 元禹常의 善政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元禹常은 부조시장과의 관련은 물론 迎日縣 治所가 대잠에 옮길 때의 현감으로 迎日鄕校의 大岑移設및 이 고장의 學德을 위해 노력을 기울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南편의 큰 碑는 '觀擦使尹相國慈承永世不忘碑'로서 北淸ㆍ成興ㆍ江陸ㆍ通川 등의 巨商을 비롯하여 浦倉監宮 및 都監 출신자들이 1881년 北關과 江原道 商人의 애로(거래상품 저장소 부족, 상거래 질서의 혼란, 도적과 잡배의 횡포)를 해소하여 이 고장의 商去來 질서를 바로 잡고, 扶助場을 비롯하여 이 고장 市場을 융성을 회복토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한 당시 慶尙道 관찰사 尹慈承의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 碑는 이 고장 商業發達史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귀중한 文化財이다.

이로써 邑治가 옮겨진 시기(生旨洞에서 1871년에 大岑洞으로 옮겼다가, 1886년 다시 生旨洞으로 옮김)과 扶助場의 폐시(1871)와 복시(1878)시기가 상호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부조장이 폐시된 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은 누구보다도 市場으로 인해 여러 형태로 수입을 올렸던 商人과 中明洞을 위시한 舊 迎日邑 治所의 居住民이었다.  이같은 주민과 부조시장과 관련된 사람들의 곤란을 해결하는데 앞장서고 부조시장의 번영에 功이 컸던 두 현감과 한 관찰사의 善政을 기념하기 위해 碑를 건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현감의 頌德碑를 통해 부조시장이 폐쇄된지 7년만에 다시 復設하게 된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나타난 行商接長, 負商接長, 場感宮 등의 명칭은 당시의 市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行商은 속칭 도붓 장수로서 물건을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니며 파는 장사 또는 장수를 말하며, 負商은 등짐장수를 말한다.  5일마다 開市하는 場市를 따라 규칙적으로 行商하는 봇짐장수(褓商)과 등짐장수를 보부상이라 한다.  市場과 도시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킨 것은 보부상이었다.  보부상이나 부상의 구별은 조직이나 기능면에서 보다도 판매하는 상품의 종류에 의하는 것으로서, 보상은 綢鍛ㆍ布木ㆍ鍮器(놋그릇)ㆍ烟竹(담뱃대), 단추ㆍ혁대ㆍ刀子ㆍ銃毛物ㆍ귀금속 장식품ㆍ冠具(갓,망근,탕근 등)ㆍ빗ㆍ붓ㆍ먹 등 기술적으로 발달된 細工品(주로 사치품)으로 비교적 비싸고 精緻 한 보자기에 싸기 편리한 잡화를 취급하였으며, 부상은 木器ㆍ담배ㆍ土器ㆍ漁鹽ㆍ乾漁ㆍ陶磁器ㆍ방망이ㆍ호두깨ㆍ草席ㆍ바가지ㆍ草鞋(짚신) 등 재래적인 家內手工業品과 水産物로서 비교적 값이 싸고 지게로 운반하기에 편리한 조잡한 日用品을 취급하였다.(<韓國文化史系>Ⅱ)
  보부상은 民衆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그들과 접촉한 商品流通機構로서 교통이 불편하던 이 시기의 상품유통에 있어서 모세혈관적 존재였다.  그들 중 大負商, 大褓商들은 水通과 陸馱로 다량의 상품을 일시에 운반하여 판매하기도 하였으며, 그들은 강력한 同業組合을 조직하여 시장에 있어서의 경제적 실권을 쥐고 있었다.

接長이란 명칭은 이러한 조합조직의 하나인 位階 단위의 長명칭인 것이다.  그리고 場監宮은 관청에서 파견되어 장판으로 다니면서 물건 값의 높고 낮음을 살피는 등 장판의 질서를 유지케 하는 공무원이다.
이렇게 복시된 扶助市場은 옛 모습을 점차 회복하여 주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킴은 물론 迎日縣勢를 신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으리라고 본다. 더욱이 1886년 迎日縣廳의 大岑에서 舊邑이었던 生旨洞에 옮긴 이후로는 그 역할의 비중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19세기에는 場市와 商業의 발달에 따라 浦市(浦口)에서는 商稅가 독립적인 收稅項目으로 설정되어 조정이나 지방관아의 중요한 稅收源으로 등장되었다.  당시 浦口에서의 收稅는 漁監稅, 즉 生産處에 대한 수세와 선박에 부과되고 있는 '有船之稅' 인 船稅, '可泊之稅' 인 地稅, '可行之稅' 인 商稅로 구분된다.  地稅는 八道通行之規로서 선박의 크기에 따라 大ㆍ中ㆍ小船 등의 형태로 구분되거나 , 二帆船, 一帆船 등의 형태로 구분되면서 浦口에 드나들 때마다 수세되었고, 商稅는 일단 선박의 규모에 관계없이 그 선박이 살고 있는 물자의 다소에 부과되고 있었다.
浦市主人(客主, 旅閣)에 의해 收捧되는 口文(口錢)이 바로 商稅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宮房이나 衙問에서 浦口를 복속시키면 대부분의 그 포구에 收稅監宮이나 導掌을 두고 收稅하였다.  즉 궁방이나 아문은 住人이 수봉한 口文 중의 일부를 수봉 하였던 것이다. (<韓國史論>13, <18, 19C에 外方浦口의 商品流通발달>)
당시 扶助場은 迎日縣의 관장하여 있었다.  19세기 중반의 勢道政治와 구한말의 閔氏政權下에서 賣宮賣職이 성행할 때 영일현감 자리가 노른 자위로 公定價가 높았으나 부임 1년에 買宮한 대금을 충당할 수 있었다는 傳說은 그 사실 여부를 불문하고 扶助市場의 융성한 규모를 알려주는 일화가 되고 있다.

조선후기 商業발달과 지방 場市의 번창으로 점차 民家資本을 형성하여 近代化의 과정을 밟던 중 불행하게도 外勢의 進出을 自主的으로 수용하지 못하고 급기야 일제침략의 마수에 걸려 한국 경제는 파행적인 걸음을 걷게 되었다.  일제가 러일전쟁 준비를 위해 1902년에 착공 京釜線이 1905년(光武 9) 5울에 개통되고, 요소마다 軍事道路, 新作路가 개설되고, 또한 各 沿岸의 어로권이 탈취되고, 기차ㆍ자동차ㆍ기선등으로 陸路와 海路가 그들의 의해 거의 독점되면서 韓國의 상업행위는 위축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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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담당 : 자치행정국 > 문화예술과 주무관 윤현정 (☎ 054-270-22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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